예술을 위한 음악과 음악을 위한 예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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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병욱 댓글 0건 조회 1,138회 작성일 2024-03-19 00:00예술을 위한 음악과 음악을 위한 예술 사이
“그는 예술을 하고 싶어 음악을 하는 것 같아.” 지난해 어떤 음악가를 두고 동료가 말했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했기에 나 역시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예술’은 명사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술하다’라는 우리말 동사로 쓰일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극단적이고 간단하게는 예술이라는 타이틀과 인정, 그와 같은 이미지에 급급해 음악을 이용한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막상 실제로는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뉘앙스가 엉켜 있다. 예술처럼 보이지 않고는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 자체가 배경이자 변명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거대하나 희소한 기회 그리고 어디나 널려 있는 혹독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불확실성, 급격한 속도의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이 절대다수의 일상을 압박한다. 상대적으로 음악산업은 좀 더 가혹한 편이다. 국내 음악산업 매출이 근래 크게 성장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체 종사자 수는 오히려 줄었다고도 한다. 매출액의 80%는 4대 기획사 매출에 편중되어 있으며, 그 4대 기획사의 종사자 수는 다른 분야와 산업의 대기업, 절대 강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98~99%의 숫자 가까이 1인 음악가, 기획사 혹은 중소 기획사에 해당하며 이들에 대한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음악가의 중위 소득은 다른 직업을 지닌 사람들의 소득에 비해 현저히 낮다. K-POP이 한국의 자랑거리라는데 음악가, 음악 관련 종사자라는 직업은 대체로 자랑거리가 아니다. 지독한 무관심과 경쟁 속에서 ‘전업 뮤지션’이라는 말은 갈수록 언감생심이다. 애초에 대형 기획사 소속 음악가로 데뷔하지 않으면, 얼마 되지 않는 지원 사업을 따내기라도 하지 못하면, 내 음악 작업기는 그저 밑 빠진 독 물 붓기의 일환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한 소외는 자연히 예술이나 음악의 본질적 가치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공간을 줄어들게 함을 인정한다. 음악이 지닌 가치와 음악인의 가능성은 유튜브 조회 수나 스포티파이 월별 청취자 수로 재단된다. 이에 따라 음악가들은 자연히 예술적 진정성과 삶의 지속성 사이 갈팡질팡하게 된다. 스스로 상업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음악의 경우 작품 자체가 갖는 무형의 정성적 가치는 가시화하고 객관화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예술성이 곧 음악가 자신의 언어 위주로 대변된다. 서점 가판대에 언뜻 엇비슷한 내용과 문체로 보이는 경수필이 잔뜩 널려 있듯, 그저 내 언어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미학이자 예술의 관점인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상황이 그러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알고 있다. 음악의 참된 예술성은 자의성에 매여 있지 않으며, 좋은 작품은 언제나 과거의 전통과 레퍼런스, 당대의 고민 및 예술계와의 치열한 소통을 거쳐 완성되어왔음을. 고민과 소통을 담보하지 않은 개인의 발화를 예술로 포장하는 건, 근거도 출처도 없는 AI의 임의 선택을 창의로 인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예술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자신을 초월해 정신적, 도덕적, 심미적 가치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 헤겔(Hegel)의 ‘절대정신의 자기표현’은 단지 기계적인 진정성 문제, 감각적인 즐거움의 차원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네 악기를 마스터하고, 네 음악을 마스터하라. 그 다음 모든 걸 잊어버리고 단지 연주하라.”(Master your instrument, master the music, and then forget all that bullshit and just play.) 찰리 파커(Charlie Parker)가 남겼다는 이 말은 직관과 즉흥, 연주력이 그 미학에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는 재즈가 아니라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모든 음악이 단순히 청각의 즐거움, 주체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를 넘어서 음악의 미학, 예술과 세계, 각자의 본질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길 바랄 필요는 없다. 다만 누군가는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 속에서 별을 건지려 하고 있으며, 그들의 예술로써의 예술이 아닌 예술로서의 예술이 경시해서는 안 됨을 역설할 따름이다.
이를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들어야’ 한다. 외설인지 예술인지 “보면 안다.”(I know it when I see it.)라고 말한 미국 대법원 판사의 말(1964)은, 그가 예술을 공부한 사람이 아님에도 본능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외설의 영역을 예술과 분간하려 했기 때문에 통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음악은 다르다. 예술에 종속된 음악인지, 음악을 위한 예술인지 그냥 듣고도 모를 때가 있다. 독일어에서는 ‘안다’(know)라는 말을 그저 경험적인 인식으로 안다는 뜻의 단어 ‘kennen’과 구체적인 사실과 정보를 안다는 뜻의 단어 ‘wissen’으로 구분한다. 개별 작업을 적당히 듣고 흘려보내거나 자화자찬하는 게 아니라, 인식과 지식 전반에 걸쳐 알고 만들고, 알고 듣고, 알고 기획하고, 알고 비평하는, 하려는 자세가 계속해서 존중받을 때 우리는 음악과 예술의 가치를, 인간의 창의성에 관한 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 이는 요즘과 같은 현실에서 유독 숫자나 통계, 시상식 수상이나 지원 사업 선정만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가와 청자를 향한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향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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