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A 마티아스 빈켈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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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준 댓글 0건 조회 1,074회 작성일 2023-06-06 00:00ENJA 마티아스 빈켈만 인터뷰
반세기를 아우른 현대 재즈사의 소중한 발자취
※ 오는 6월 19일은 독일의 엔자(Enja) 레이블을 50년 동안 이끌었던 프로듀서 마티아스 빈켈만(Matthias Winckelmann, 1941~2022)의 1주기가 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를 원문 그대로 “청각의 사유”에 올린다. 꽤 긴 내용이지만, 되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은 매우 소중한 인터뷰였다. 2021년 당시 인터뷰를 주선해준 ‘굿 인터내셔널’ 관계자들에게 감사 드린다.
2021년,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엔자 레이블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71년에 창립된 엔자는, 정통 모던 재즈에서 프리 재즈와 에스닉 재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인 위대한 레이블이다. 지금까지 제작한 앨범은 940여 장. 두 명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마티아스 빈켈만과 보름 동안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리나라에서 매체와 유통 등 재즈를 ‘알리는’ 입장에 선 관계자들에게 엔자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역사의 흐름에서 짚어내야 할 찬란한 업적은 아직도 충분히 얘기되지 못했고, 많은 걸작이 세월의 여파 속에 감춰진 보석으로 남았다. 마티아스 빈켈만과 함께 엔자를 창립했던, 상대적으로 실험성을 좀 더 중시했던 호르스트 베버(Horst Weber)가 1980년대 중반 레이블을 양분해 운영하면서 유통 라인이 얽혔다는 점, 그리고 여러 서브 레이블을 둔 탓에 프로모션의 집중도가 다소 떨어졌던 부분은 아쉬운 대목이다. 호르스트 베버가 판권을 갖고 있던 앨범들은 현재 그 후계자인 베르너 알딩거(Werner Aldinger)가 관리하고 있다.
2020년대의 재즈는 팬데믹 속에서도 많은 도전을 통해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속살을 한 겹 더 들춰보면, 지금 우리가 새롭다고 평가하는 많은 어법의 원형들이 이미 197~80년대의 선현들에 의해 제시됐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옛날이 좋았다는 투의 한탄이 아니라, 음악 외적인 여러 요인 탓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몇몇 ‘미씽 링크(missing link)’를 더 늦기 전에 제자리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엔자는, 재즈의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재조명돼야 할, 현재진행형의 소중한 발자취다.
음악 산업에 헌신하기 전,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연주 지망생이었거나, 재즈 마니아였는지요? 청소년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기숙사가 딸린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재즈의 중심이었죠. 방학이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 클럽인 도미질(Domizil)에 가곤 했습니다. 처음 좋아했던 연주자는 재즈의 초창기를 이끈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었죠. 그래서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과 팝에 치우쳐 있던 내 첫 선생은 정말 엉터리였지만요. 당시 내 우상은 벅 클레이튼(Buck Clayton)과 합 립스 페이지(Hot Lips Page)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앨범을 하나 사게 됐죠. 내 손에 들어온 첫 LP였습니다. 그 앨범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고, 훗날 재즈와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였어요.
이른 나이에 인생의 행로를 정하신 셈이군요.
아버지의 독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아버지께선 원래 현대 화가를 꿈꾸셨는데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셔야 했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인에겐 개인의 꿈을 좇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꽤 성공하셨어요. 하지만 내 결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마친 뒤, 오래된 폭스바겐 비틀(Beetle)을 끌고 친구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몇 주 뒤 돌아와 보니 프랑크푸르트 주변에선 모든 대학이 입학 원서 접수를 마감했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서류를 받고 있던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죠. 그리고 뮌헨에서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됐습니다.
엔자 레이블의 서막이군요.
그렇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뮌헨의 재즈 클럽에서 호르스트 베버를 처음 만났습니다. 몇 년 뒤 그와 엔자 레이블을 설립하게 됐죠. 그 역시 아주 진지한 재즈 팬이었습니다. 엔자를 만들기 전, 그는 한 패션 회사에서 재단사로 꽤 좋은 경력을 쌓고 있었어요.
엔자의 출범과 1970년대의 독일
1971년, 맬 월드론(Mal Waldron)의 앨범을 첫 작품으로 드디어 역사가 시작됩니다.
재즈에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학업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을 저질렀죠. 타고 다니던 차를 팔고, 아버지에게서 2만 마르크를 빌렸습니다. 그 돈은 엔자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갚을 수 있었고요. 우리는 여름이면 뉴욕으로 건너가 여러 연주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레이블의 카탈로그를 늘려나갔어요. 타미 플래내건(Tommy Flanagan), 쳇 베이커(Chet Baker),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 같은 유명한 연주자들이었죠. 물론 미국뿐 아니라 유럽 출신 연주자들의 앨범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예컨대 헝가리 태생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있던 기타리스트 아틸라 졸러(Attila Zoller)와도 여러 좋은 앨범들을 만들었죠. 개인적인 친분도 아주 돈독했어요. 내가 뉴욕에 가면 그의 아파트에 묵고, 그가 유럽에 오면 내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식이었습니다.
일본 연주자들의 앨범도 여럿 제작하게 됐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호르스트 베버가 패션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그는 일본 출장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재즈계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죠. 그러다가 레이블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앨범을 제작하게 된 겁니다. 트럼페터 테루마사 히노(Terumasa Hino), 피아니스트 마사히코 사토(Masahiko Satoh)와 요수케 야마시타(Yosuke Yamashita) 같은 연주자들이었죠. 우리는 그들을 초청해 베를린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시키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사실 그들의 존재는 독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요수케 야마시타 같은 경우 아주 신선하고 현대적인 연주 덕에 꽤 많은 팬들이 생길 정도였어요. (엔자와 일본 연주자들의 인연은 유럽 시장에 일본 재즈가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관계가 확장되면서 우리나라의 강태환 선생도 1980년대 중반, 유럽에 진출할 수 있었다. 엔자의 첫 타이틀이 맬 월드론의 앨범이었던 것도 1960년대 말 일본에서 그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_김현준)
1970년대 초는 격변기였습니다. 재즈 록의 시대였고, 일반 대중음악계도 록과 팝이 대세였죠. 그 와중에 재즈 레이블을 만든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재즈 쪽에서 볼 땐 좋기도 했어요. 규모가 큰 메이저 레이블들은 재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기회가 온 셈입니다. 우리가 독일 투어를 주선하기도 했던 존 스코필드의 경우,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뉴욕의 한 스튜디오에서 (재즈가 아닌) 소울 가수의 반주자로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상황 속에서 꾸준히 제작에 임할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에 유통망을 갖게 됐어요. (훗날 재즈비평가 마틴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1970년대, 록과 팝에 밀린 미국의 재즈 연주자들이 음악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럽 레이블들이 공이 매우 컸다. 독일의 ECM과 엔자가 대표적이다.” _김현준)
오래전, 엔자라는 이름이 ‘유러피언 뉴 재즈(European New JAzz)’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요즘엔 굳이 그 표현을 쓰지 않으시더군요.
우리가 처음 만든 회사의 이름은 ‘European New Jazz’가 맞습니다. 훗날 호르스트 베버가 회사를 떠난 뒤 나는 그 이름을 ‘(주) 엔자 레코드 마티아스 빈켈만(ENJA RECORDS Matthias Winckelmann Ltd.)’으로 바꾸었죠. 그리고는 좀 더 다양한 스타일 쪽으로 레이블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우드 연주자 라비 아부-칼릴(Rabih Abou-Khalil) 같은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독일은 미국 못지않은 재즈의 강국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1970년대 초반 당시 독일의 재즈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나는 언제나 정통 모던 재즈의 아티스트들을 존경해 왔습니다. 보스니아 태생으로 비엔나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뮌헨에 정착한 트럼페터 두스코 고이코비치(Dusko Goykovich) 같은 인물 말이에요. 이러한 정통주의자들이 재즈의 생명력을 유지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는 곧 90세가 되는데 아직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죠. (두스코 고이코비치는 지난 2023년 4월 세상을 떠났다._김현준) 1970년대 초, 독일에는 라이브 음악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테너 색소포니스트 베니 월러스(Bennie Wallace)도 그때 만난 사람 중 하나였죠. 역시 여러 장의 앨범을 만들었고 그의 투어를 주선하기도 했어요.
교육이나 매체의 환경은 어떠했나요?
바로 그 시절에 모든 음악 학교들이 재즈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독일 내에서 팝과 흑인음악의 위협은 사실 오늘날처럼 강하지 않았어요. 이젠 대부분 사라졌지만, 당시 텔레비전에선 앞다퉈 라이브 재즈를 방영했습니다. 앨범 제작도 아주 활발했죠. ECM 레이블이 설립됐을 때도 개인적으로 관여했습니다.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가 함께하자고 요청했었거든요. 하지만 뒤늦게 학업을 마치느라 졸업 시험을 준비해야 해서 합류하진 못했어요.
195~60년대에 탁월한 음악성을 선보였던 미국의 음악인들이 유럽을 찾아 계속해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을까요?
뛰어난 미국의 연주자들이 유럽을 찾아 수없이 많은 공연을 벌였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공연 내내 관객들에게 등을 돌린 채 연주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군요. 다행히 핀 마이크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소리엔 문제가 없었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릇 스타란, 자신이 원하는 걸 직접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정말 인상적인 공연이었어요. 프랑크푸르트의 클럽에서 피아니스트 피니어스 뉴본 주니어(Phineas Newborn Jr.)가 아틸라 졸러와 함께했던 공연도 잊을 수 없습니다. 화성적으로나 멜로디 면에서 아주 환상적인 연주를 들려주었죠. 드러머 엘빈 존스(Elvin Jones)를 처음 만난 건 이탈리아에서였어요. 우린 곧 친구가 됐고, 좋은 앨범들을 만들 수 있었죠. 내 인생의 벗 중 하나가 바로 그였습니다. 물론 쳇 베이커의 마지막 공연이 벌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두말할 필요도 없어요. 정말 놀랍고 집중력이 뛰어난 무대였거든요.
아티스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엔자는 모든 스타일의 재즈를 아우를 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습니다. 작품 제작에 있어 특별한 지향은 없었나요? 혹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던 것인가요?
나는 언제나 아티스트의 음악 안에서 진솔함과 개성을 찾아내려 노력했습니다. 그 스타일이 비밥이든, 블루스든, 혹은 세실 테일러(Cecil Taylor)처럼 실험적인 음악이든 상관없었어요. 아티스트는 반드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연습을 통해 습득한 뛰어난 연주력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 얼마 전 발표된 피아니스트 미리엄 얼터(Myriam Alter)의 앨범을 생각해 봅시다. 베이시스트와 듀오로 녹음했는데, 대단한 표현력의,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선율이 앨범 내내 흐르거든요. 미리엄 얼터는 몇 년 전 한국에 연주하러 갔다 오기도 했죠. 당신네 나라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프로듀서로서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요?
좀 철학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아티스트가 가진 최고의 것들을 꺼내게 하여 눈앞에 실체로 펼쳐 보인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그렇다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시스템이나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특히 좋았던 작품들의 경우, 녹음 과정에서 그냥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던 것이죠. 물론 기술적인 측면도 아주 중요합니다. 좋은 엔지니어와 수준급의 스튜디오는 필수겠고요. 뉴욕에서 녹음 작업을 진행했을 땐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 같은 엔지니어가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독학을 통해 놀라운 사운드를 만들어낸 인물이죠.
프로듀서로서 보람을 느낀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뛰어난 작품을 만들게 됐을 때가 그 무엇보다 뿌듯했겠지만요.
피아니스트 압둘라 이브라힘의 『Echoes From Africa』(1979)를 녹음하던 때가 떠오르네요. 베이시스트 조니 다이아니(Johnny Dyani)와 듀오로 벌인 연주였죠. 압둘라 이브라힘이 녹음 스튜디오가 있던 슈투트가르트로 기차를 타고 왔어요. 짐을 푼 뒤 곧 연주를 시작했는데, 단 세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모든 연주가 끝난 거예요. 그래서 그는 바로 다음 기차를 타고 슈투트가르트를 떠날 수 있었죠. 연주와 녹음 환경 등 모든 게 완벽하게 진행됐던 셈인데, 프로듀서로서 그런 상황을 만나는 건 정말 놀랍고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연주자들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내 삶을 참 풍족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난 50년간 재즈 또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변화에 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전자음악과 관련된 것이 가장 컸죠. 사실 내가 작업한 앨범 중에서 일렉트로닉스를 활용한 경우는 많지 않았어요. 나의 지론은, 그것을 ‘옳게’ 사용했을 때 흥미로운 작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의 앨범들이 그런 경우라고 봐요. 어쨌든 나는 아직도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새로운 실험을 벌이는 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엔자 레이블의 업적 중 하나는 제3세계 음악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한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서유럽 출신 음악인들만 있었다면 재즈는 절대 지금의 높은 위상을 갖지 못했을 거예요. 근년 들어 다시 아프리카 출신 음악인들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어요. 아프리카는 예술 분야에서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곳입니다. 머지않아 엄청난 걸작들이 쏟아져나올 거예요. 조만간 우리도 아프리카 연주자들로만 구성된 작품을 제작할 계획입니다. 생전의 조 자비눌(Joe Zawinul)과도 몇 년간 연주했던 베이시스트 알루네 와데(Alune Wade)의 앨범이에요. 아주 뛰어난 편곡자이기도 한데, 이미 소니 레코드를 통해 좋은 작품은 선보인 바 있죠.
변화하는 세상 속의 ENJA
처음 한국과 교류를 하던 시절의 얘기도 궁금합니다. 첫 파트너가 지구레코드사였죠?
지구레코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미안함이 큽니다. 한국 출장을 가서 훌륭한 음식을 나누며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서 계약이 진행됐어요. 지구레코드는 상당히 많은 양의 주문을 했는데, 그중에는 당시 생산이 힘들었던 앨범도 여러 장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때가 LP에서 CD로 주요 매체가 바뀌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그 빠진 앨범들에 대해서도 한국에선 대대적인 홍보를 이미 진행했던 거예요. 그래서 지구레코드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큰 기회를 놓친 셈이었어요.
엔자가 만들어낸 많은 걸작과 높은 음악적 성과에 비해 아직도 한국에선 그 가치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재즈의 아름다움을 더 널리 알릴 방법이 있을까요?
결국 좋은 라이브를 직접 보는 경험만큼 효과적인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열 수 있다고 봐요. 녹음된 레코드로 재즈를 듣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나 역시 젊어서부터 페스티벌을 포함해 수많은 공연을 마주했기에 여러 다양한 스타일의 재즈를 느낄 수 있었고요. 테너 색소포니스트 돈 바이어스(Don Byas)는 유럽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밤 아주 작은 클럽에서 라이브를 펼쳤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있어 그보다 더 좋은 경험이 과연 있을까요?
이젠 전달 매체 또한 음원이 대세를 이루었죠. 엔자 레이블은 아직 음원 시장에 적극적으로 발을 담그지 않고 있습니다만.
오로지 음원으로만 작품을 유통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감이 큽니다. 내게 하나의 앨범은 많은 요소가 집약된 예술품이에요. 음악은 물론이고 재킷 디자인이나 라이너 노트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슬프게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이젠 우리도 앨범을 직접 판매하는 것보다 디지털을 통해 얻는 수익이 훨씬 더 크거든요.
최근에 제작한 앨범 중 특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작년에 발표된 피아니스트 가이 민투스(Guy Mintus)의 『A Gershwin Playground』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발매된 지 한 달 만에 1,000장이 넘게 팔릴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거든요. 재즈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죠. 코로나19로 인해 더 이상 프로모션을 벌일 수 없었지만요.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작년부터 올해까지 상업적으로는 특히 힘든 시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본,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유통 덕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엔자에서 앨범을 만든 연주자들이 종종 한국에서도 공연을 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팬데믹이 끝나고 나면 한국의 공연 프로모터들은 가이 민투스를 제일 먼저 섭외하라고 반드시 권하고 싶어요.
아직 엔자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레이블의 강점을 짚어본다면요?
엔자는, 높은 수준을 갖춘 음악이라면 어느 아티스트에게나 열려 있는 레이블이었어요. 단언컨대, 지난 50년간 나는 돈을 이유로 앨범을 제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덕에 아주 좋은 카탈로그를 구축해낼 수 있었죠. 물론 부자가 되진 못했어요. 참, 엔자의 서브 레이블 중엔 마시아스(Marsyas)라는 클래식 레이블도 있습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뛰어난 작품들이 포함돼 있죠. 일본의 클래식 음악 팬들이 큰 관심을 보여서 최근에 유통이 결정됐습니다. 한국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살펴보길 권합니다.
이 한 번의 인터뷰에 엔자의 위대한 역사가 모두 담길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말 짙은 발자취를 남겼죠. 앞으로도 엔자를 통해 더 많은 감동의 순간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팔순이라는 내 나이가 결코 적진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건강해요. 적어도 엔자가 계속해서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낼 거라는 부분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2021년)
ps. 결국 마티아스 빈켈만은 이 인터뷰를 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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