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훈 & 류다빈 (2023년 1월 14일 @ CJ 아지트 광흥창) > 공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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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준 댓글 0건 조회 854회 작성일 202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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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훈 & 류다빈 (2023년 1월 14일 @ CJ 아지트 광흥창)

  • 김현준
  • 23-02-03 12:45

외견만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현재 우리 재즈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성(新星)과 학업을 마친 뒤 뉴욕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촉망 받는 젊은 연주자. 마치 재즈 피아노의 역사를 되짚으려는 듯 교과서에서 종종 언급되던 명곡들로 꾸린 레퍼토리. 그리고 무르익은 연주력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피아노 듀오의 편성.


강재훈과 류다빈은 무대를 쥐락펴락, 소신과 열정으로 가득 찬 연주를 쏟아냈고 관객들은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연이어 뜨거운 갈채로 화답했다. 전체적인 스타일은 정통 모던 재즈에 가까웠다. 우리나라에서 얼 하인즈(Earl Hines)의 「Rosetta」를 실제 공연에서 연주한 예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에이티브에도 능한 두 사람답게, 번뜩이는 반전과 현대성이 곳곳에 심겨 있었다. 누군가 공간을 비우면 다른 한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 자리를 꿰찼고, 또 누군가 화두를 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이를 발전시켜 새로운 실마리를 상대에게 건넸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처럼 흥미진진하고 빈틈없는 공연을 마주하는 건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문장들만 갖고 리뷰를 마무리해도 충분할 것 같다. 하지만 이 무대에 대해 꼭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연주가 이어지는 내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던 깨달음 때문이었다. 공연은, 한국(에서)의 재즈가 드디어 새로운 챕터를 써 내려가게 됐다고 ‘선언’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강재훈과 류다빈이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라는 사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두 사람은 기성세대와 다른 클래스의 지향과 가치로 무장돼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무장’이란 말은 적확하지 않다. 애초에 두 피아니스트는 앞선 세대들과 완벽히 차별화된 디딤돌 위에서 출발했다.


두 연주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 강재훈을 처음 마주한 건 2010년 자라섬 국제 재즈 콩쿨을 통해서였다.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이슈메이커였다.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던 이들은 훗날 강재훈이 얼마나 큰 아이콘으로 성장하게 될지 쉼 없이 기대를 쏟아냈다. 류다빈은 2013년에 처음 만났다. 사천 국제 재즈 워크숍에 참가했던 그녀는 당차고 진지한 표정으로 건반을 눌렀다. 당시 선생으로 초빙됐던 벤 스트릿(Ben Street)은 사석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재즈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놀랍다(phenomenal).” 강재훈과 류다빈은 각각 스무 살 무렵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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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훈과 류다빈에겐, 우리나라 재즈 연주자들의 절대다수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강박’이 없다. 말하자면 두 사람에게 재즈는, 완전군장을 한 채 땀 뻘뻘 흘리며 기어 올라가 정복해야 할 고지가 아니다. 언젠가 부득이하게 맞닥뜨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선 자신들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핸디캡(?)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강재훈과 류다빈의 재즈는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가장 유용한 수단일 뿐, 어쩌면 즐겁고 행복하게 마주할 수 있는 ‘놀이’일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 기성세대는 ‘감히’ 재즈를 그렇게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강재훈과 류다빈의 존재가 비평적으로는 더없이 기쁘고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부럽다. 이 생각도,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재즈를 곁에서 지켜보며 마음속에 그려두고 있던 하나의 역사적 맥락, 혹은 그에 따른 관념에 의한 것이다. 팩트는 ‘두 연주자는 한국 재즈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매우 탁월한 재즈 연주자’이다. 하지만 그간 이들이 국내외를 넘나들며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재즈의 미학과 부단한 노력, 그리고 타고난 재능 이외에 재즈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애초에 달랐기에 오늘날의 눈부신 성과를 올리게 됐으리란 얘기다. 왜? 재즈는 기술이 아닌 마인드 게임의 결정체이므로.


강재훈과 류다빈이 구체적으로 어떤 연주를 어떻게 들려주었는지 첨언하진 않겠다. 내가 이 공간에 ‘공연 리뷰’를 쓰는 이유는 ‘누가 언제 어느 공연에서 연주한 어느 곡이 참 좋았다’는 얘길 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음악계에 이슈를 던질 만한 무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궁금하면, 무대를 찾으시라. 만날 부르짖지 않는가, 재즈는 즉흥이라고. 그런데도 남들이 유튜브에 올려둔 수십 년 전의 음원에 파묻혀 본질과는 무관한 인상주의적 단상만 늘어놓는 이들이, 나는 참 우습다.


그래도 강재훈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신선함’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공연에서 강재훈은 류다빈에게 아주 넓고 다채로운 가능성의 흥미로운 ‘마당’을 선사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자신도 더 많은 걸 누리거나 과시할 수 있었는데도, 아끼는 동료이자 후배가 더 많은 걸 펼쳐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까 강재훈이 벌써 그 정도의 여유와 넓은 시선의 폭을 갖출 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다.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행보가 적잖은 자산으로 작용했을 법하다. (나는 ‘현재의 강재훈’에게 아쉽고 궁금한 대목이 없지 않다. 이는 음악적 시각에 따른 것이니 다른 기회에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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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재즈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과 마주한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그만큼 삶이 재즈에 압도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재훈과 류다빈은 다를 것 같다. 물론 그러진 않겠으나, 만약 강재훈과 류다빈이 재즈를 떠난다 해도 나는 그 결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포기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일 테니. 


우리에겐 ‘죽이는 연주’를 들려주는 이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강재훈과 류다빈 같은 태도로 재즈를 대하는 이들은 더 많이 필요하다. 주어진 삶이 끝나기 전에 내가 그런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까. 젠장, 바로 이런 강박의 마음을 버리고 싶다는 얘기다. 한 연주자, 하나의 공연, 한 장의 앨범을 개별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굳이 역사적이거나 시대적인 흐름에서 파악하려는 자세. 이건 지금껏 내가 비평을 이어온 원동력이지만 결정적 한계로 작용할 때도 적지 않았다. 결국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것이다. 자의적 선택이었으니 후회는 없다.


생물학자 최재천 선생은 모든 후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다. 과학적으로는 그럴 법해도, 온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강재훈과 류다빈은 이 말이 미학적으로도 옳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적절한 예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재즈의 다른 인종이 우리 곁에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는, 다양한 유전자가 뒤섞이는 가운데 우월한 종으로 진화한단다. a285770e611297f5f52a9bdd9916843f_1675395931_5109.jpg 


ps. 이 글의 초고를 쓰던 며칠 전, 사석에서 한 연주자와 강재훈과 류다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꽤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해왔지만 아직 재즈계에 임팩트 있는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그는 “저들처럼 좋은 재능과 환경을 갖고 있지 못한 저는 아름다운 재즈를 연주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응답했다. “그런 마인드로 재즈에 접근해왔다면, 음악의 신 뮤즈가 내릴 벌을 어찌 감내하려는가.” 재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정한 교훈을, 의외로 많은 이들이 까맣게 잊은 채 관성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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