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술 『Point Of Contact』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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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준 댓글 0건 조회 1,561회 작성일 2022-10-18 00:00이원술 『Point Of Contact』 (2012년)
아름다운 진행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한 베이시스트의 역작
※ 한국 재즈사에 길이 빛날 이 작품이 발표된 지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베이시스트 이원술이 이 하나의 앨범만으로도 그가 한국 재즈계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욕심은 감추기 힘들다. 언젠가 유사한 컨셉트의 새 앨범이 그의 손에서 다시 빚어지기를 기다린다.
다음 조건들에 부합하는 재즈 장르는 무엇인가?
① 1950년대 중후반에 시작.
② 두 장의 문제작 『Music For Brass』(1956)와 『Modern Jazz Concert』(1957).
③ 건서 슐러(Gunther Schuller), 존 루이스(John Lewis), 조지 러셀(George Russell), 지미 쥬프리(Jimmy Giuffre) 등의 거장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④ 재즈와 클래식의 경계.
재즈의 흐름을 마음속에 정리해둔 사람이라면 정답이 ‘제3의 물결(Third Stream)’임을 이내 알아챘겠지만, 음악 팬이라 해도 절대 다수는 위의 앨범이나 음악인들이 낯설 수밖에 없다. 베이시스트 이원술의 리더 데뷔 앨범 『Point Of Contact』는 에두름 없이 ‘제 3의 물결’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는 재즈 듣기의 시각과 태도를 가늠할 시금석과 같은 작품이다. 평소 자신이 재즈를 어떤 시선으로,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깨닫게 할 앨범이란 뜻이다.
재즈와 클래식, 두 이질적인 음악 영역을 동시에 언급했다 해서 클래식을 재즈로 편곡한 것이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클래식 음악의 어법을 차용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떠올리지 않기 바란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새로운 양식의 편곡으로 ‘제 3의 물결’은 한 때 많은 음악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높은 지지를 얻었다. 이젠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버렸고, ‘실험실의 음악’에 불과했다며 비판할 수도 있지만, 이를 표방한 걸작들은 아직도 간간이 등장한다. 멀지않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 건서 슐러가 함께한 색소포니스트 조 로바노(Joe Lovano)의 『Rush Hour』(1994)나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Steve Swallow)의 『So There』(2005), 그리고 그가 색소포니스트 오하드 탈모르(Ohad Talmor)의 편곡을 빌려 완성한 『L'Histoire Du Clochard』(2002) 등이 ‘제 3의 물결’의 성공적인 레퍼런스다. 물론 이 작품들을 기억하는 건 “재즈가 삶의 일부”인 마니아들뿐이겠지만 말이다.
베이시스트 이원술이 2012년에, 아직도 재즈의 저변이 충분하지 못한 이 땅에서, 더구나 오랜 연주 생활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표한 음악이 ‘제3의 물결’이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추하건대, 둘 중 하나로 보인다. 남몰래(?) 이 스타일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다가 더 미룰 수 없다는 소신에 불을 붙여 고집스레 작업에 임했거나,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의거해 이미 완성형에 이른 과거의 영광을 뒤늦게 되살려보려 했거나. 이원술의 의지가 무엇이었든, 판단의 근거는 역시 작품 그 자체다. 녹음은 이원술을 비롯해 기타리스트 오정수, 피아니스트 한충완, 드러머 김홍기 등의 재즈 연주자들과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루트, 혼을 연주한 클래식 음악인들이 맡았다.
여느 재즈 앨범의 제작 기간과 비교했을 때 작업은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수록된 아홉 곡 중 이원술의 작곡은 둘뿐이며 클래식 작곡가 등 다른 이들이 만든 곡이 대부분이다. 물론 작품의 단초는 작곡이지만, 과정과 결말을 이끈 뼈대는 역시 이원술의 편곡이다. 때로는 처음 만들어진 모티프가 어느 부분인지 명확히 가려내기 힘들 정도로 이원술은 그 구성체들을 임의대로 해체하고 재조합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새로운 패턴을 구축해내거나, 이를 다시 2차적인 소재로 전용해 또 다른 발전의 토대로 삼은 흔적도 발견된다. 오래도록 ‘제3의 물결’에서 시도돼 설득력을 얻은 어법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그 차용이 독창성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한동안 이 스타일의 흐름과 가치, 그리고 특성을 성의껏 관찰해왔으리란 심증을 남기며 되레 큰 덕으로 작용한다.
이원술과 한충완, 그리고 오정수의 자유즉흥 연주로 녹음된 「The Flow Of Soul」을 중심으로 앨범의 흐름은 ‘외견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그렇다고 이를 굳이 이질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겠다. 후반부의 세 곡이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들리는 화성을 선보이지만, 이는 앞선 다섯 곡이 워낙 강한 존재감을 지녔기 때문이다. 곡들의 성과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클래식 음악을 분석할 때처럼 주제의 전이와 재생 혹은 반전의 구성을 제 때 파악해내야 하는데, 혹시 그 세세한 진행을 좇는 것이 감성을 방해한다고 느낀다면 차선으로 관찰해야 할 부분은 다이내믹과 톤이겠다. 누구의 발상에서 비롯됐든, 어느 타이밍에 어떤 톤의 어느 악기가 어느 정도의 무게로 사용됐는지 살펴보면, 『Point Of Contact』처럼 디테일이 강한 앨범을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다 재즈적인 관점에서, 그러니까 연주자 개개인의 역할과 전체 앙상블의 효과를 우선시해 이 앨범을 바라본다면, 한충완과 오정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근년 들어 녹음 활동이 적은 한충완이지만, 솔로의 한두 소절만 들어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개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럼에도 건반 앞에 앉힐 최적임자가 바로 한충완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만큼, 『Point Of Contact』는 캐스팅이 좋은 작품이다. 오정수 또한 마찬가지. 그가 최근 들어 어떤 톤과 프레이징에 집중했는지 생각하면, 이 편곡은 애초부터 오정수의 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심증마저 갖게 한다. 실제로 나는, 두 연주자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분량과 무관하게, 한충완의 연주를 중심축으로 둔 채 한 번, 오정수의 연주에 방점을 찍은 채 또 한 번, 앨범을 반복해서 들어봤다. 두 연주자는 이원술의 창작 의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 가지 더 특기하고 싶은 것은 앨범의 후반 작업과 만듦새다. 작지 않은 편성 이외에도 이런 스타일일수록 첫 녹음의 소스(source)가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프로듀싱을 맡은 이원술과 권오경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는’ 세심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만만찮은 편곡 속에서도 감성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앨범 전체의 구성도 설득력이 높다. 예컨대 「Nexus」는 첫 곡으로 등장하기 위해 태어났고, 타이틀곡이 세 번째에 자리한 것도 합당하며, 「The Way」보다 끝 곡에 잘 어울리는 경우는 없다. 후반 작업의 핵심인 믹싱과 마스터링을 뉴욕의 아바타(Avatar) 스튜디오에 맡긴 것도 효과적인 투자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성과를 올곧게 느끼기 위해 앨범, 즉 CD를 손에 넣어 최대한 풍성한 울림의 스피커로 감상하기를 권한다. 인상적인 재킷 디자인 또한 온라인 음원을 통해서는 맛볼 수 없는, 괜찮은 흥밋거리다.
인상주의적인 차원의 감상이라면 모를까, '제3의 물결‘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인식을 갖추지 않고 이 앨범을 ’평가하는‘ 일은 불가하다. 이 ’현실‘이 『Point Of Contact』의 운명(?)을 처음부터 결정지었다. 그 결과가 때로는 어쩔 수 없는 단(短)으로, 때로는 독보적 위상의 장(長)으로 비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재즈의 역사 속에 처음 시도된 스타일이란 점에서, 일관된 정서를 유지한 채 세계적 흐름을 통해 검증된 편곡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시종일관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하다가도 아름다운 진행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종종 짜릿한 전율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내 판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후자다. 문제작이란 표현도 어울릴 이원술의 『Point Of Contact』는, 한국 재즈계가 2012년에 만들어낸 가장 탁월한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201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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